선배의 부인께서 항상 강조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말이다. “수학을 포기하는 것은 대입을 포기하는 것, 영어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의 많은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떤 기회인가.
예컨대 이런 기회가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존 헤네시 스탠퍼드대 총장을 인터뷰했을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세계 유수 대학들이 탐내는 석학은 불과 2000여 명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환영하는 학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건 가고 싶은 대학으로 얼마든지 옮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예컨대 학계의 방향을 제시하는 최상급 학자가 중국에 있는데 그가 영어를 모른다면 그를 영입하기 위해 통역까지 채용할 것인가.” 헤네시 총장은 “영어를 할 줄 아는 그 학자의 제자를 뽑을 것이다”고 답했다.
헤네시 총장의 말은 오래전 읽은 글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글이었다. 어떤 우리 재미 동포의 아들이 학교에서 장래 희망이 미 합중국 대통령이라고 했더니 애들이 “너는 미국 출생이 아니라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우리 동포는 귀국을 결심했다. 자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극소수 사람만이 세계적인 대학의 교수나 국가 최고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나’나 ‘내 자식’하고는 동떨어진 세상 이야기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적어도 엄청난 심리적인 차이가 있다.
연상 작용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을 낳은 사연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김용옥 학생은 어떤 분이 부러웠다. 그래서 그 선생님처럼 ‘폼 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영어만 잘하면 돼”가 대답이었다. 그 말을 굳게 믿은 도올은 꾀를 피우지 않고 ‘무식하게’ 어학을 연마했다.
물론 영어만 잘하면 안 된다. 전공 분야에서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면 전공 분야 문헌을 남보다 빨리 흡수할 수 있다. SK의 고(故) 최종현 선대 회장은 “어차피 신입사원들을 새로 다 가르쳐야 하는데 영문학과 출신이 제일 낫다”고 말했다. 한 가지 스킬(skill)을 익힌 경험이 있어야 다른 스킬도 쉽게 배운다.
세계화된 세상이다. 유학을 안 가도 된다. 아프리카에 있는 대학이건 세계 500등 안에 못 드는 대학이건 상관없다. 박사과정 졸업 전에, 그리고 후에 세계적인 학술지에 뛰어난 논문을 게재하면 된다. 얼마든지 하버드대·옥스퍼드대 교수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세계화는 나쁜 점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좋은 점도 있다.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가 말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국가 간에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 사회의 기득권층이 자신들이 확보한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일반 대중과 서민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 있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인재 채용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정책이 입안·실천되고 있다.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 학생의 학습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다. 또 토익(TOEIC) 점수 같은 스펙(spec)보다는 창의성 있는 인재 채용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기사들이 눈에 자주 띈다. 본지 3월 21일자 8면에 “서울대, 현 고2부터 수능영어 빵점과 만점 점수차 4점뿐”이라는 기사가, 22일자 10면에는 “중·고 때 공부 제대로 안 한 탓”이라는 작은 제목이 달린 “서울대 이공계 ‘영어 울렁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러한 대세에 감춰진 ‘함정’은 없는 것일까. 설사 정부가 대입에서 영어를 아예 빼 버린다고 하더라도 “영어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의 많은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는 것을 관념으로가 아니라 실제 체험으로 아는 부모는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소위 ‘금수저’는 영어 습득이 쉬운 환경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영어는 ‘흙수저’에게도 개방된 사회이동(social mobility)의 사다리다. 영어가 곧 국가경쟁력이자 개인의 경쟁력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적·개인적 굴기(屈起)의 기회가 어려워지고 있는 시대에 스스로 사다리를 걷어차면 안 된다. ‘영어 비중 줄이기’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대학 입시에 한문이 나오면 너도나도 한문을 잘한다. 영작문이건 논술이건 교육 정책에 따라 신입생의 특정 분야 수학능력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교육 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그 어느 나라 정부도 우리 정부를 따라 갈 수 없다. 우리 정부는 그 힘을 국력 강화에 써야 한다. 포퓰리즘 정책은 당장은 귀에 솔깃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건강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해친다. 경제 포퓰리즘만 있는 게 아니다. 영어 비중 줄이기 정책은 ‘교육 포퓰리즘’이다.
사족이지만 꼭 붙이고 싶은 게 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최근 『미래 시민의 조건-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정말 ‘징그럽게’ 우리말을 잘한다. 비결이 궁금했다. 교재는? 신문이었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중심으로 한국어·일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김환영 논설위원
기사 출처: 중앙일보 2016년 4월 1일 자 [세상읽기] 영어라는 ‘사다리’는 걷어차지 말자
본 기사는 "중앙일보 2016년 4월 1일 자 [세상읽기] 영어라는 ‘사다리’는 걷어차지 말자" 전문으로 YBM 한국TOEIC위원회 측과 협의하여 사용을 허락받은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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